문서의 임의 삭제는 제재 대상으로, 문서를 삭제하려면 삭제 토론을 진행해야 합니다. 문서 보기문서 삭제토론 민족민주혁명당 사건 (문단 편집) == 상세 == 적발된 계기는 희극 같은 황당함에서 시작되었다. [[최정남·강연정 부부간첩 사건]]이 민혁당의 실체를 드러내게 한 중요한 시발점이다. 1997년 8월 [[조선로동당]] 사회문화부 5과 소속인 부부간첩 최정남, 강연정은 공해상을 통해 우회하여 [[거제도]]에 상륙해 남한 사회에서 생활하며 재야인사 포섭, 유사시 [[서울 도시철도]]의 철도망 파괴 및 [[경북대]] [[김순권]] 교수가 개발한 슈퍼[[옥수수]]의 종자를 획득할 목적으로 침투했다. 여기에서 모티브를 얻어서 만들어진 영화가 바로 [[간첩 리철진]](1999년작)이다. 이 영화에서 옥수수가 돼지로 바뀌었을 뿐 리철진이 남한으로 잠입한 이유는 실제 사건과 거의 같으며 [[http://news.chosun.com/site/data/html_dir/1997/11/27/1997112770387.html|영화에서처럼 실제로 이들 간첩은 생각보다 좀 얼뜬 모습을 보였다고 한다(...).]] 최정남, 강연정은 1997년 10월 민주주의민족통일전국연합(전국연합)의 울산지부인 [[울산연합]]의 간부 정대연[[https://www.sarangbang.or.kr/hrdailynews/60489|#]]에게 접근했다. 북한은 오랜 기간 동안 남한 내 지하 조직망 구축을 위해 [[운동권]] 및 정치인들의 명단을 확보한 후 포섭 대상을 분석 후 접근해 왔다. 후술되는 주사파 대부 김영환도 이런 과정 속에서 북에 포섭된 인물이다. 참고로 정대연은 총학생회장 출신인 인물로, 북한에 대해 호의적인 인물이었다고 한다. 둘은 울산연합 간부 정대연에게 "김영환 소개받고 왔다. 북에서 왔으니 통일사업을 위해 함께 하자"는 제안을 했다. 이 멘트는 북한 당국의 지시였을 뿐, 실제 김영환이 소개한 것은 아니었다고 한다. 그리고 사실 이 시점에 김영환은 [[주체사상]]에 대한 회의감으로 인해 거의 활동을 중단한 상태였다. 그런데 울산연합 간부 정대연은 '''"아무래도 북한에서 온 게 아니라 [[국가안전기획부|안기부]]에서 나를 검거하려고 함정을 파는 것 같다."'''고 생각하여 이 남파 간첩을 안기부에 신고했다. 이때가 마침 [[제15대 대통령 선거]] 불과 두 달 전이었다. 당시 [[문민정부]]는 [[레임덕]]과 [[1997년 외환 위기]]로 인해 이미 식물정권이었고 집권당 [[이회창]] 후보는 아들의 병역기피 의혹으로 만신창이였던 데다 [[이인제]]는 독자출마를 선언했다. 때문에 재야와 운동권에서는 궁지에 몰린 정권이 대형간첩단 사건을 터트려서 [[북풍]]으로 반전을 노릴 것이라는 예측이 팽배했다. 실제 매번 선거를 앞두고 그래 왔으니까. 마침 그런 시기에 난데없이 북에서 왔다는 사람이 나타났으니까 당연히 [[정보기관]]의 공작으로 의심한 것이다. 안기부는 그야말로 소 뒷걸음 치다 쥐잡는 격으로 간첩을 하나 검거하게 된 것. --그리고 정모씨는 종북이란 공격을 막는 최고의 방패를 얻었다-- 그런데 최정남을 취조하던 중 [[https://www.donga.com/news/article/all/19990909/7468613/1|"90년대 초반 남조선의 대학생들 두 명이 공화국을 찾아와 김일성 주석님을 만나고 갔다"]]는 진술을 확보했다. 이로 인해 안기부를 비롯한 정보당국은 남한에 북한과 연계가 있는 주체사상 지하조직이 있을 거라는 추리를 했다. 당시 남한의 [[NLPDR|NL]] 운동권 내부에 [[주체사상]]을 신봉하며 친북 성향을 보이는 그룹이 존재한다는 것은 공공연한 사실이었지만 이들이 북한과 연결되어 있다는 증거는 명백하지 않았다. 남한의 주사파는 1980년대 초중반에 자생적으로 형성되었고 1990년대 후반까지는 범NL계도 [[주체사상]]의 수용에 다양한 온도 차이가 있었다. 주체사상을 말 그대로 교조적으로 수용하고 북의 지도를 수용하는 그룹(자주단결)이 있었는다 하면 주체사상은 믿지만 북과의 연계는 거부하는 그룹(사람사랑), 수령론을 빼고 주체사상을 자기 나름대로 변형한 그룹(새벽), 아예 주체사상 자체를 거부하는 비주사NL 등 다양한 분파가 모여 있는 복잡한 상황이었다. 하지만 이미 1992년에 북의 거물 공작원 [[리선실]]이 재야와 학생운동권 간부들을 포섭해서 반체제 지하당을 조직했다는 "[[남한조선노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이 일어난 바 있었다.[* 참고로 이 사건도 [[노태우 정부]] 말기에 대선을 앞두고 일어난 사건이다. ] 다만 이 사건의 경우 조작 혹은 과대포장되었다는 의혹이 있다. 그러던 중 1998년 12월 [[대한민국 해군]]이 여수시 앞바다에서 [[여수 반잠수정 격침사건|북한의 공작원 6~8명을 태운 반잠수정을 격침]]시키면서 민혁당에 대해 보다 명확한 사항들을 파악할 수 있었다. 침몰한 반잠수정을 수색해서 북한 공작원 진운방 등의 시신과 각종 유류품을 발견하였는데 해당 반잠수정에 탑승한 공작원이 민혁당 인사들과의 접촉 사실과 민혁당의 내부 조직을 기록한 문서가 나온 것이다. 민혁당 자체는 '주사파의 대부'이자 강철서신으로 유명한 [[김영환(1963)|김영환]]이 1989년 2월 출소 후 가입한 반제청년동맹(반청)의 후신이다. 반청은 준비위원 하영옥, 이석기, 박금0, 김0운, 김0희 5인으로 구성되었으며 이석기는 준비위원이 그대로 중앙위원이 되는 것이 모양새가 안 좋다며 스스로 하방하고 대신 준비위원 4명에 김영환이 포함된 중앙위원으로 구성되었다. 여기서 이석기만 외국어대 용인캠퍼스고 나머지는 전부 서울대 출신이다. 특히 하영옥과 김영환은 서울대 법대 82학번으로 3학년에 '고전연구회'라는 지하서클을 만들어 활동하던 사이로 다른 3명은 후배였으니 결국 하영옥과 김영환이 반청의 리더였다. 김영환은 반청 시기인 1989년 7월 북한의 남파간첩 윤택림에 의해 조선로동당에 현지 입당했다. 정식으로 입당할 수 없는 상황에서 하는 현지 입당을 화선 입당이라고 부르는데 [[빨치산]] 소설을 보면 자주 등장한다. 소설 [[남부군]]의 주인공 [[이태]]가 이런 식으로 빨치산 활동 중 화선 입당하였고 마지막 빨치산 [[정순덕(빨치산)]] 같은 사람도 화선 입당하였다. 화선 입당 후 김영환은 '관악산 1호'라는 암호명을 부여받았다. 그리고 김영환은 자신이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여 북한에 선을 대고 있다는 사실은 하영옥에게 귀띔해 주어 반청에서 주도권을 쥐었다. 이어 윤택림의 주선으로 1991년 북한에 밀입북하여 [[김일성]]과 만나고 [[조선로동당]]에 정식 입당한 후 공작금 20만불을 받아서 돌아왔다. 이때 연락책 1명을 선발해서 대동하라는 지시를 받고 서울대 후배인 조유식([[1998년]] [[알라딘 커뮤니케이션]]을 설립)을 대동하고 [[월북]]하였다. 반제청년동맹은 북에서 돌아온 김영환의 주도로 1992년 발전적 해산을 단행하고 곧바로 민족민주혁명당(약칭 민혁당)을 결성했다. 반청 중앙위원 5명 중 3명이 그대로 지도부가 되었는데 김영환(서울대 법대 82학번), 하영옥(서울대 법대 82학번), 박준X(서울대 후배, 변호사) 3인이 중앙위원으로 지도부를 형성하고 산하에 경기남부위원회(위원장 [[이석기]]), 영남위원회, 전북위원회를 두었다. 1997년 당시 민혁당원은 전국적으로 약 100명 정도였는데 철저한 점조직, 단선조직 형태로 구성되어 있었기 때문에 조직원끼리도 서로 몰랐다고 한다. 중앙위원 3인은 각기 전북(김영환), 수도권(하영옥), 영남(박준0)으로 나누어서 하부조직을 관리하였다.[* 단, 김영환은 하영옥이 울산위원회, 경기동부-남부, 부산, 마산-창원지역을 관리했다고 주장했다.] 다만 이 중에서 경기남부위원회는 원래 [[성남시]]와 외대 용인캠퍼스를 연고지로 활동하던 조직이 그대로 들어온 것으로 어느 정도 독립적인 조직이었다. [[통진당 부정경선]]을 거치면서 [[경기동부연합]]의 실체가 폭로된 뒤 운동권 출신 인사들이 인터뷰에서 '경기남부위원회'가 원래 명칭이라고 했던 이유가 이것이다. 정조직원 외에도 민혁당은 지하당 준조직원 수준의 역량을 갖춘 사람들을 수십 명 단위의 조직으로 묶어 RO(Revolution Oraganization 혁명 조직)라고 부르며 관리하였는데 김영환의 주장에 따르면 17개의 RO조직원 300여명이 있으며 다시 민혁당과 RO 산하에 RMO(혁명적 대중 조직)라고 부른 외곽 서클이 존재하며 활동가가 수천 명에 달한다는데 이는 확인된바는 없다. 하지만 RO는 대법원 판결에 따르면 [[http://m.hani.co.kr/arti/society/society_general/674860.html#cb|실체가 인정되지 않는다고 힌다.]] 정리 하자면 조선로동당 내 사회문화부(후에 대외연락부로 개칭) 5과장 윤택림이 김영환을 시켜 만든 조직이 민혁당이었다. 또 민혁당 창설 전후인 1990~91년 사이 수도권 지역에서 '우리 조직원들을 다른 지하조직에서 자꾸 포섭하려 접근한다'는 보고가 김영환에게 들어왔는데 김영환이 어떻게 된 것이냐고 윤택림에게 물어보니 이후 북한측에서 민혁당의 활동 지역을 서울, 경기, 전북, 영남 등으로 한정지어 주었다. 그러다가 1992년에 터진 충청과 강원 일대를 중심으로 활동하던 지하당이 드러난 사건이 일명 '[[중부지역당 사건|조선로동당 중부지역당 사건]]'이다. 북의 대남공작기관들끼리 서로 경쟁하다 보니 같은 시기에 북의 지령을 받는 지하조직 2개가 만들어졌고 서로 활동이 겹치게 되니까 북에서 활동구역을 정해 준 것이다. 김영환은 90년대 이후 북한의 경직된 사회상을 목격하면서 주체사상에 대한 회의와 북한의 [[고난의 행군]]을 보며 1995년경부터 심경에 변화를 보였는데 진보월간지 [[월간 말]] 1995년 4월호에 기고한 '반미, 북한, 90년대에 대한 나의 생각'이란 칼럼에서 이런 모습이 보인다. 그러다가 1997년 중앙위원 투표를 거쳐서 결국 민혁당을 해체하였다. 투표 결과는 해체 찬성 2 (김영환, 박준0) vs 해체 반대 1(하영옥)이었다. 이후 하영옥을 중심으로 해체 반대파들이 전국을 돌면서 조직을 재건한 것이다. 또 조선로동당 사회문화부에서 보낸 화교를 가장한 진운방(가명)이라는 새로운 간첩이 김영환과 연결되었다. 김영환이 민혁당을 포기하자 진운방은 하영옥과 접촉하여 그를 [[조선로동당]]에 화선 입당시키고 민혁당의 새로운 총책으로 추인했다. 그리고 하영옥과 새로운 연락책인 심재춘을 북한으로 데려가기 위해 잠수정으로 왔다가 하영옥이 개인 일정으로 못 가게 되자 그냥 [[여수 반잠수정 격침사건|승조원 5명과 함께 돌아가다가 격침되어 전원 시체로 발견되었고]] 진운방의 수첩 속에 김영환과 하영옥의 이름이 나오게 된 것이다. 이때 김영환은 중국에 체류하던 중이었는데 월간조선의 [[조갑제]]의 주선으로 선처를 조건으로 1999년 한국으로 들어와 자수했다. 민혁당 사건으로 인해 김영환은 징역 10년, 하영옥은 징역 8년, 심재춘은 징역 5년, 김경환은 징역 4년 6개월 등 중형이 선고되었다. 1991년 간첩 윤택림에 의해 밀입북한 게 민혁당 총책 김영환과 연락책 조유식(서울대 후배, 당시 월간 <말>지 기자)이며 1998년 간첩 진운방에 의해 밀입북할 뻔 한게 민혁당 총책 하영옥과 연락책 심재춘(대학강사)인 것이다. 김경환은 민혁당 영남위원회 산하 울산위원회 조직원으로 어쩌다 보니 간첩 진운방과 접촉하였고 이를 중앙에 보고하여 김영환에게 연결 시켜 주며 본인도 소속을 민혁당 중앙으로 옮겼고 1989년 9월 [[조선로동당]]에 입당하였다. 김영환이 민혁당을 포기하자 진운방의 부탁으로 하영옥과 연결을 주선하였고 이에 하영옥이 민혁당 총책으로 추인받게 된 것이다. 그러나 김영환은 이미 북한에 대해 환멸을 느껴 모든 것을 불었고 국정원과 자수자에 한하여 처벌하지 않는다는 [[사법거래|거래]]를 했다. 이에 기소 후 [[구치소]]에서 1개월간 대기하며 [[준법서약제도|준법서약서]]를 쓴 후 공소보류로 풀려났다. 그리고 중앙위원 박준0과 연락책 조유식 등 10여명이 자수하여 수사에 협조하였고 대부분 사법처리 없이 풀려났다. 다만 하영옥 계열만은 끝까지 자수하지 않았다. 잠수정 사건이 일어나기 전인 1997년 7월에 일명 '영남위원회'사건으로 민혁당 영남위원회 산하 '울산위원회(위원장 박경순)' 15명이 기소되었다. 그러나 체포 후 일관된 부인으로 민혁당이 상부 조직이라는 것은 밝혀지지 않고 넘어 갔었다. 마침 이때 최초의 진보단체장이라는 프로필로 화려하게 등장했던 울산동구청장 [[김창현(1962)|김창현]]이 당선 한 달만에 구속돼서 큰 충격을 안겨주었다. 김창현은 이듬해인 1999년에 결국 국가보안법 위반 확정 판결로 구청장 직위를 상실하였다.저장 버튼을 클릭하면 당신이 기여한 내용을 CC-BY-NC-SA 2.0 KR으로 배포하고,기여한 문서에 대한 하이퍼링크나 URL을 이용하여 저작자 표시를 하는 것으로 충분하다는 데 동의하는 것입니다.이 동의는 철회할 수 없습니다.캡챠저장미리보기